일단은
이유가 있다고 가정하고 이유를 찾아봤습니다. 많은 경우 예수님이 직접 말 안하시고, 뭔가를 깨닫기를 원하시면서… 뭔가를 배우길
원하시면서 이렇게 행하시는 경우가 있어서요. 다만, 학자들의 주석서를 보면 완전히 이래서 그렇다..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구요, 여러 가지 설명들을 하고 있네요. 그들의 설명을 읽어보면서… 잘 판단해보려고 해봤습니다.
어떤 학자는 맹인이 직접 오지 않고, 친구들이 데려왔기 떄문에 … 그에게 뭔가를 알려주시려고 이런 방식을 사용하셨다고 말합니다 (
The
fact that the initiative seems to have come m
brought him than from the man himself may account for the way Jesus
dealt with him (cf. Mark 7:32ff.). Walter W. Wessel, “Mark,”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Matthew, Mark, Luke, ed. Frank E. Gaebelein, vol. 8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4), 691.)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는 별로 설득력은 없어보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 4명의 친구들이 지붕뚫고 병자를 들것에 실어
내려보내셨을 때에 예수님은 그를 굳이 만지면서.. 복잡한 방식으로 고치지 않으셨던 것을 볼 때.. 별로 안 와닿는 설명입니다.
적용도 아닌 것 같구요.
어떤 학자는 이런 방식으로 그 맹인의 믿음이 조금
일깨워지고, 그 다음에 완전히 고침을 받게 되는 이 방식이 제자들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계신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뭐가 좀 보이냐는 질문을 유달리 하신 걸 볼 때… 이 맹인의 믿음에 문제가 있어서 한꺼번에 완전히 못고치신게
아니고, 옆에 있는 제자들에게 뭔가를 가르치시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2018년 마가복음을 읽고 있는 나에게 원래 영적
소경이 눈뜨는 과정이 한번에 안될 수 있다.. 는 걸 가르쳐주려고 이런 기적을 적어놓으셨다…는 설명은 좀 아전인수격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것은 적용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래와 합쳐보면 도움이 되는 것 같애요.
어떤
학자는 마가복음에만 나와있는 두개의 기적 (7:31-37의 귀먹은 자를 고친 기적 & 8:22-26의 눈먼자를 고친
기적) 이 현재 제자들의 상태(봐도 보지 못하는 영적소경의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는 설명을 하네요. (Perhaps we can see in these two men illustrations of the disciples’ spiritual condition described in Mark 8:18!
Warren W. Wiersbe, The Bible Exposition Commentary, vol. 1 (Wheaton, IL: Victor Books, 1996), 138.)
17-21절에서
제자들을 책망하셨는데, 아직도 모르겠냐고요.. 제자들의 수준이 바리새인들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기적을 보았으면 이제 예수님과 함께 있는 한 먹는 것과 관련된 아무런 걱정도 안해도
되는구나…라고 깨달아야 영적으로 보는 사람인건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빵의 누룩 설명하시는데, 누룩이란 단어로 빵을 떠올리고, 아까
남은 빵 왜 안가져왔냐면서 그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기적을 보고도… 여전히 믿음이 없는 제자들의 상태, 이스라엘의
상태..를 말씀하시는 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매님 질문처럼 왜 그렇게
복잡한 방법으로 여기서는 굳이 고치신걸까? 라는 질문에 대답을 찾아보면.. 무엇을 배우길 원하신 걸까? 무슨 이유가 있는건가?
하는 질문을 한다면… 위의 학자들의 해석과 관련한 적용이라고 보여지는데요.. 일단 이 소경은 나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기적들을 보고도 여전히 예수님을 잘 모르는...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을 상징하고 있는 사람....
그런데 이 소경을,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이유로 (친구들이 데려와줬어도) 만나주시고, 고쳐주시는데, 한번으로 완전히 보지 못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 계속해서 주님께 나아오고 보길 원한다고 말할 때, 또 한번 만져주시고 결국은 완전히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성령께서는 영적인 소경의 상태에 있는 바리새인과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동시에 끝까지 보길 원한다고, 난 못보는
사람맞다고… 나아오기만 하면 받아주시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고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해석보다는 적용같기는 한데… 조자매님
덕분에 이리 저리 찾아보다가… 그 와중에 이런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시네요.. 저 소경이 제자들 상태인 것 같네, 바리새인들
같네.. 그런데 나 같기도 하네… 나도 예수님 기적 경험했는데.. 여전히 닥치는 상황에 두려워하고 믿음없는 행동 하니까… 그런데
내가 주님께 나아가면, 바리새인들처럼만 안하면, 비록 한방에 영적인 거인은 못되더라도… 나를 내치지 않으시고 나를 주님을 뚜렷이
보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시겠구나… 라고 말입니다. 이런 나의 주 예수님.. 그분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처음에는
그냥 예수님은 어떨 때는 이런 식으로, 어떨 때는 저런 식으로 고쳐주시는 분이구나..하고 넘어갔었는데… 정확한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조 자매님 덕분에 이 말씀에서 이런 주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한번에 다 못보더라도,
한번에 갑자기 영적인 사람은 못되더라도, 계속해서 주님만 붙잡는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내 옆의 지체가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영적인 것에 여전히 둔하더라도… 여전히 육신적이고… 미운 짓을 하고 내게 상처를 주더라도… 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고쳐주기 원하시는 사랑의 예수님께 그를 데리고 나아가 주님께 맡기는 우리들이 되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It
[소경을 이런 방식으로 고치신 것] was a fitting follow-up to His rebuking the
disciples (vv. 17–21). The man was no longer totally blind, but his
sight was still poor. How like him were the disciples!
John D. Grassmick, “Mark,” in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An Exposition of the Scriptures, ed. J. F. Walvoord and R. B. Zuck, vol. 2 (Wheaton, IL: Victor Books, 1985), 138.)